조선4대사화(무오사화)
저자: 김인숙 2016.08.08~08.18
한 권의 책인데 각 사화별로 나누다 보니 4번으로 구분하여 블르그에 올린다.
1. 무오사화
성종 17년(1486년) 김일손은 관직에 첫발을 내 딛는다. 그는 사직 후 학문에 몰두 하든 중 밀양의 김종직 문하로 들어간다.
세조 때 우의정 이인손의 아들 이극돈등 그이 5형제 모두 문과에 급제 한다.
연산군 4년(1498년) 이극돈이 사관 김일손이 쓴 史草(사초)를 점검하는데
사초 내용이 이극돈의 전라감사시절 이야기 이다
즉 세조비 정희 왕후 사망시 한양을 향해 香을 바치지 않았고 행찻길에 기생을 데리고 다닌 비행과 불경을 잘 외운 덕에 전라도 관찰사가 되어 숱한 뇌물을 받았다는 등 상세히 적혀 있었다.
이극돈은 김일손을 몰래 찾아가 사초에서 위의 내용을 지워달라 부탁했으나 거절당한다. 김일손의 사초에는 세조를 모독하고 집권의 부당성을 들어내는 글이 많았다. 이극돈은 사초를 계속 읽던중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읽고 그 내용이 단종을 죽이고 왕이된 세조를 비난하는 글이라고 본다.(중국 고사 비유: 초나라 회왕의 손자인 의제 심이 서초패왕 항우에게 폐위 당하고 죽었는데 김종직이 제문형식을 빌어 의제를 폐한 항우를 비난 한 글)
서자로 태어나 무술에 능한 유자광은 1467년 함길도 길주 이시애가 난을 일으키고 유자광이 진압하자 그 후 그는 출세길에 들어선다. 남이장군의 휘하에 들어가 있다 남이장군을 모함한다.(남아이십미평국을 남아이십미득국으로 고쳐)
유자광은 처가가 있는 함양으로 놀러갔다가 시한편을 지어 함양군수에게 주면서 나무판에 새겨 벽에 달아 두기를 부탁한다. 후에 김종직이 이를 보고 현판을 떼어 부수고 불살라 버렸다. 유자광은 이 일에 감정을 가지고 있던 중 이극돈과 함께 조의제문 건으로 김종직을 탄핵한다.
◎연산군의 성장 배경
성종비 공혜왕후 한씨(한명회의 딸)은 후사가 없이 일찍 죽는다. 제헌왕후 윤씨를 맞아 아들 융(뒤에 연산군)을 낳았다. 그를 임신중일 때 성종은 많은 후궁들과 잠자리를 같이 하자 제헝왕후는 질투가 심해 성종의 얼굴에 상처를 남긴다. 인수대비(성종의 어머니 이자 연산군의 할머니. 그는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대비자리에 오른다)의 눈에 나게 된다. 결국 제헌왕후 윤씨는 사가로 쫓겨나고 사약을 받게 된다. 그가 죽자 융은 인수대비에 의해 월산대군 부인 박씨에게 맡겨졌다. 월산대군은 성종의 형이다. 성종은 월산대군이 이어 받을 왕위를 자기가 이어 받았다는 마음의 빚 때문에 월산대군에게 집을 지어 주고 덕수궁이라 했다. 연산은 어머니가 폐위된 사실, 사약을 받았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연산은 세자 책봉 후 태중일 때 윤씨의 질투심 대문인지 성격이 포악해진다.
연산은 즉위 후 성종의 우유부단한 성격에 불만을 갖고 왕권회복을 위하여 사사건건 대신들과 대립한다. 훈구파인 유자광, 윤필상은 사림파 제거를 위하여 조의제문을 말하며 김종직과 김일손이 대역부도를 꾀했다고 왕에게 보고 했고 왕은 김일손을 잡아 들이라 명한다. 김종직은 부관참시, 김일손은 능지처사가 내려졌다. 수많은 사림파는 귀양을 간다.
유자광은 논밭과 노비를 상으로 받고 이극돈은 즉시 보고 하지 않았다고 벼슬에서 쫓겨난다. 이상이 무오사화이다.
사화는 士禍라 하는데 선비들이 화를 입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무오사화는 史禍라 쓰는데 史草 때문에 일어났다하여 史자를 쓴다.
이후 갑자사화가 있기전 까지는 연산군은 그런데로 정치를 잘 이끌어 나간다. 성종때 간신 임사홍은 먼지방에 유배하고 평생토록 등용 않겠다는 처벌을 받았으며 그의 아들 임승재는 연산의 비위를 맞추며 지내다 그의 아비 임사홍이 부당하게 유배되었다 상소한다. 상소 3년 뒤 임사홍은 다시 기용된다. 임사홍은 유자광과 처남인 신수근과 손잡고 폐비 윤씨 사건을 밀고 하여 갑자 사화를 일으키게 된다. 이후 연산은 장녹수에게 빠진다. 중종 반정이 일어나자 장녹수는 비참하게 죽는다.
요약
시기: 1498년
왕조: 조선 연산군
계기: 사림들을 몰아내려는 훈구세력들은 당시 사림세력을 이끌던 기종직이 쓴 조의제문을 핑계로 삼았다. '조의제문'은 항우가 초나라의 어림 왕을 몰아낸 것을 비판하는 내용이었으나, 유자광을 비롯한 훈구세력들은 이것이 제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죽인 것을 빗대어 쓴 글이라고 주장했다. 사사건건 트집을잡아 사림을 시맇어했던 연산군은 이를 기회로 ㅅ림을 축출했다. 史草가 계기가 되어 일어났기 때문에 다른 士禍와 달리 史禍라 불린다.
결과: '조의제문'을 쓴 김종직은 이미 죽었으나 연산군은 부관참시의 형벌을 내리고, 그를 추종했던 제자들과 사림 대다수가 관직에서 쫓겨나거나 귀양을 떠나게 되었다.
2016.08.25 블로그에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