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속 숨어있는 역사
최동군 2016.09.02~09.11
★광통교:
청계천 2 번째 다리(광화문 쪽에서)에 사용된 돌은 신덕황후(이성계의 두번째 처)의 정릉(처음엔 덕수궁 근처에 있었다. 이성계가 죽자 방원이 정릉으로 이장)에 있든 석물을 사용해서 다리를 놓았다. 그래서 돌의 모양이 특이 하고 돌에 많은 조각이 들어가 있다.
★정조 반차도:
광통교를 지나 광교에서 장통교 사이에 벽화 형식으로 그린 그림.
1795년 정조 대왕이 8일 간에 걸친 수원 행차를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라는 책에 나오는 반차도를 그린 것이다.
원행은 묘도 능로 아닌 산소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사도세자의 무덤을 말한다. 을묘는 1795년을 의궤는 정리소를 만들어 행사준비를 했기 때문에 붙인 말이다.
★조선 후기 군사 체계
오(伍): 5명의 군사가 배속
대(隊): 두 개의 伍. 그래서 10명인데 취사병 1명을 추가해서 11명
대오를 맞추다의 隊伍는 여기서 나온 말이다.
기(旗): 3개의 隊. 그래서 33명이다.
초(哨): 3개의 旗. 이곳 지휘관을 哨官이라 하는데 포함하면 100명이다.
사(司): 5개의 哨. 그래서 500명이다.
영(營)또는 부(副) : 5개의 司. 그래서 2500명이다.
※ 사람이 죽으면 음의 기운과 양의 기운으로 분리 된다. 사람이 죽으면 두 가지 공통적인 현상이 일어나는데 눈의 동공이 풀리고 항문의 괄약근이 열린다. 양의 기운은 동공을 통해 빠져나가 하늘로 올라가려하고 음의 기운은 항문을 통해 땅으로 스며들려고 한다. 이 때 양의 기운을 魂, 음의 기운을 魄이라 한다. 혼은 紳이 되고 백은 鬼가 된다. 혼을 모신 곳을 사당(廟)이라 하고 백을 모신 곳을 墓라 한다.
★육상궁(毓祥宮):
영조가 후궁 출신인 묘친 숙빈 최씨의 신주를 모신 사당.
육상궁 건립 후 역대 왕 또는 추종 왕의 생모인 후궁들의 사당을 옮겨와 칠 궁 이라 한다.
★궁궐
북궐: 북쪽을 등지고 임금이 남쪽을 바라보는 중심 궁궐- 경복궁
화재나 전염병등의 이유로 임금이 북궐에 머물지 못할 때 대비 하여 만든 궁궐을 이궁이라 하는데 동쪽에 있으면 동궐(창덕궁, 창경궁) 서쪽에 있으면 서궐(경희궁)이라 불렀다.
궁궐의 전각은 전, 당, 합, 각, 재, 헌, 루, 정이라는 서열이 있었다.
전(殿): 왕, 왕비, 대비, 성왕의 유물을 보관 하는 곳
당(堂): 왕세자 거처
★사(士)를 글공부 하는 사람에게 쓰는 말로 잘못 이해하는데 文, 武 구별없이 보통 남자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래서 武士, 兵史, 戰士등 武에 관련된 말에도 썻다.
★나루: 배로 사람이나 짐을 실어 나르는 곳.
渡: 규모가 작은 나루(삼전도, 벽란도 등)
津: 규모가 작은 나루(노량진, 동작진, 광진 등)
浦: 규모가 조금 큰 나루
港: 대규모 바다 나루
★천도교
1894년 갑오농민전쟁(동학혁명) 실패. 4년 후 제2대 동학교주 최시형이 최포 됨. 옥에 있던 지도자 이용구는 친일 행각, 손병희는 해외에 머물고 있다가 돌아와 동학을 천도교라 개칭함. 이용구등 친일 교도 추방 후 政, 敎 일치론을 포기하고 정, 교 분리 원칙을 세움.
★철종의 가계
영조에게는 사도세자와 효장세자 두 아들이 있었다. 사도세자의 아들이 효장세자 아들로 입양후 정종이 된다.
정종에게는 은언군, 은신군, (두 명 모두 강화로 유배), 은진군(정조 살해 음모로 사사)이 있었고 은언군에게는 상계군, 풍계군, 전계군의 아들이 있었으며 전계군에게는 원경, 경응, 원범(철종)이 있었다.
★宰相: 최고의 벼슬 아치. 조선시대는 3 정승.
帝는 임금의 요리사를 뜻하는 말이었다. 음식으로 임금을 독살하려는 시도가 많았을 것이며 이를 막아 줄 사람은 가장 믿을 수 있는 요리사 뿐이었다.
相은 임금이 잠자는 동안 불침번 서는 사람. 역시 임금이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다. 여기서 나온 말이 宰相이다.
★逆葬: 자식의 무덤을 부모 무덤 위에 쓰지 못한다는 의식. 이는 임진왜란 이후 과도한 禮學 열풍이 불고 나서부터 생겼다. 즉 임진왜란 이전에는 자식 무덤이 부모 무덤 위쪽에 자리잡고 있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었다.
★숭의전
경기도연천에 있는 고려의 종묘.
고려 태조를 비롯 한 7 왕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 지내던 곳. 조선 왕조가 만들고 제사 지냈다. 원래 고려 왕조 종묘는 개성에 있었는데 이성계가 왕이 된 후 허물고 세로 종묘를 짓게 했다. (이성계 즉위 초기에는 고려왕이 었고 이때는 아직 조선이라는 국호도 정하지 못했다.) 태조 3년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 하기로 결정 했다. 숭의전을 세운 것은 민심을 달래기 위함 이었다.
2016.12.20 블로그에 올림